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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0)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류동민, 코난북스
    엄마의 생각/독서 2021. 1. 5.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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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국내도서
    저자 : 류동민
    출판 : 코난북스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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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세대도 더 전이라는 시간과 결합된 특정 공간에 관한 내 기억, 그것은 이후의 시간에 그 공간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다양한 행위, 그 행위를 추동한 욕망, 서로 다른 욕망들의 대립과 투쟁, 정치·경제·문화 권력의 작용 등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보존되고 때로는 왜곡되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번듯한 아파트에 살고 싶었던 이들의 욕망, 학교 안에 문화센터를 만들고 싶었던 이들의 욕망,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권력, 그 권력을 뽐내며 행사하고 싶었던 정치가나 관료의 욕망, 철로 변에 세워진 너저분한 건물을 재개발하고 싶었던 자본의 욕망, 그에 맞서 '역사성'을 지키려 했던 문화예술인들, 다시 그곳에 자리 잡아 밥을 벌려는 자영업자들의 삶, 내 아이에게도 가정교사로 상징되는 좋은 교육과 비 오는 날 멋진 레인코트를 갖추어주고 싶었던 부모들의 욕망,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 지금이 서울이라는 공간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다름 아닌 '공간적 실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하는 행동들. 그러나 '공간적 실천'은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공간, 만들어내고자 하는 새로운 공간의 머릿속 이미지와 대개 서로 긴장 관계에 놓인다. 산업혁명으로 인류가 몇 백만 년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시인들은 오히려 전원의 풍경을 찬양하는 낭만주의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우리는 자신에게 아련한 추억을 가져다주는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기 바라면서도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공간을 스스로 파괴하는 실천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이 삶을 착취하는 한편으로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이중성을 가지듯이, 공간에 대한 낭만적인 재현도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요구인 동시에 지배 구조를 단단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갖는다. 공간의 총체적 재현,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그 목표에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듬어 안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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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은 한국 자본주의의 성취와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곳이다. '압축 성장' 혹은 '후후발 산업화'라 불리는 한 세대 남짓 짧은 기간에 벌어진 극적인 변화, 그 상징적 장소인 서울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지켜야 할 것이건 버려야 할 것이건,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여기'를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우리의 욕망과 의도, 행동과 투쟁이 맞부딪히며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중략)

     자본축적의 리듬에 맞춰 시간도 공간도 주어진 분량 속에 훨씬 더 많은 내용물을 빽빽하게 채워 넣는 현상, 즉 '시공간 압축'은 굳이 사회과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만 읽더라도 서울이라는 도시의 변화를 실감 나게 묘사하는 말일 것이다. 서울의 하루는 다른 곳의 하루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다. 서울의 일 제곱킬로미터는 다른 곳의 일 제곱킬로미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옮겨 다녀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공간이다. (중략)

     재현 공간은 우리가 경험이나 기억, 그것들을 상징화한 형태인 신화 등을 통해 느끼는 공간이다. 서울광장이 누군가에게는 해방의 공간으로, 누군가에게는 반공 구국의 공간으로 기억되는 것은 각자의 재현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 효율을 믿는 이와 평등을 바라는 이, 성장을 좇는 이와 그 성장에서 생태 파괴의 어두운 그림자를 읽어내는 이, 기억을 지키려는 이와 허물려는 이······ 이런 공간 실천이 부딪히면서 공간은 어느 누구의 공간 재현과도 딱 들어맞지는 않은 모습으로 바뀌어가며 그들 각자는 저마다의 재현 공간을 갖게 된다.

     서울에 관한 기억, 그러므로 그것은 인문학이자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 서울, 공간의 구조는 구별 짓기와 추격, 능력주의의 환상과 실체를 기본 개념으로 삼아 분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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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시간 중에서 먹고살기 위한 일에 쓰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즉 여가의 양과 질은 소득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표준적인 경제학 교과서에서처럼 여가를 '노동시간이 아닌 것', 더 정확하게는 '소득을 벌지 않는 시간'이라는 잔여항으로 정의하면 노동력 재생산에 들어가는 시간도 여가에 포함된다. 대표적인 노동력 재생산이 통근 시간, 직무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교육 시간, 가사노동 등이다. 그래서 이른바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조차 가사노동의 착취라는 현실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듯 남성 노동자는 가부장제적 생산양식 속에서 여성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중략)

     여가는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회비용으로 계산하면 같은 한 시간이라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의 여가는 비싼 것이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의 여가는 싼 것이다. 일반적으로 '낮은' 질의 여가는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대량 생산품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높은' 질의 여가는 표준화·규격화되지 않은 고객 맞춤형 제품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여가의 품질이 여가의 가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가의 가격이 여가의 품질을 규정하는 일종의 전도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가의 품질 차이는 여가가 사용되는 공간의 차이로도 나타나게 된다. 나아가 품질이 서로 다른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는 여가의 공간도 분리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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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초 축적'이라는 용어는 원래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부지런하게 노력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신화적 설명 방식을 가리킨다. (중략) 사실 능력주의가 정치·사회적으로 활용되려면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명제보다 오히려 '성공하지 못했다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라는 대우 명제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을 들여다보는 순간 시초 축적의 신화는 무너진다. 서울처럼 급격하게 팽창하며 발전한 도시의 공간을 기획하고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권리와 이익을 빼앗아 부를 쌓는다. 직접적으로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은 소유권이 확립된 시장경제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누려야 할 이익이 특정인들에게 귀속된다면,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를 개인이 자신의 것으로 누린다는 점에서 결국 그것은 착취가 된다. 그러므로 "태초에 부지런한 이가 있어······"라는 신화는 필연적으로 "태초에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이가 있어······"라는 현실과 맞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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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퍼레이드를 위해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고 거리를 막던 방식,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간의 흐름을 차단하고 그와 관련된 국민의 기억을 왜곡하는 방식. 이것이 민주화 이전의 서울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일이었다. 이제 그 자리는 자본이 차지했다. 자본의 공간에서는 민주적인 결사나 집회의 자유도 제한된다. 물론 법과 제도의 뒷받침을 받거나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행해진다. 국가는 뒤로 빠진 듯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본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국면에서는 자본이 전권을 쥔 듯, 또 다른 어떤 국면에서는 국가가 자본을 견제하는 듯하나 근본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결합에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만 끊어낼 수는 없는 매듭이 존재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국가와 자본, 네이션은 보르메오의 매듭처럼 묶여 있는 것이므로 그중 어느 하나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아예 자본의 이름으로 불리는 국가, 예를 들어 국가 브랜드 가치라는 개념은 국가-자본 결합체가 공간을 통제하며 재편성을 기획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가 된다.

     국가-자본 결합체의 강화가 자기 관리의 수월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환상. 그 동원과 복종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몸에 스며든다. 민족은 넓게는 한민족, 대한민국의 차원일 수도 있지만 좁게는 출신 지역, 학벌, 종교, 또 그 어떤 네트워크, 예컨대 우리 강남(혹은 강북), 우리 동네, 우리 아파트(혹은 빌라)라는 차원으로도 작용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갈라 '우리'의 이익을 옹호하고 '그들'의 무책임을 공격하는 태도로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겉보기와는 달리 국가-자본 결합에 대한 믿음은 배제의 원리와도, 그리고 자기 책임의 원칙과도 쉽게 조화를 이루면서 일상적 행동의 준칙으로 성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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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가 대학을 통제하는 방식도 채찍에서 당근으로 바뀌었다. 대학에 대한 각종 평가사업, 심지어는 총장 직선제 폐지 여부 둥을 자금 지원과 연결 짓는 패턴은 일상화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국제대학원 설립 붐에서 보듯이 대학의 커리큘럼이나 교육 방향에도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캠퍼스 공간 구조의 변화로도 이어진다. 이른바 명문 대학일수록 캠퍼스는 재벌계 대기업의 이름이 붙은 신축 건물로 채워진다.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대입한다면 한국의 대학은 결국 국가-자본의 결합체 속에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대학 캠퍼스는 바뀌어간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바꿈을 주도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이미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어느 정도는 겉잡을 수없는 자체 동력을 지닌 채 움직여나갈 것이다. (중략) 자본이 전공과목의 유용성을 평가하고 그에 대해 압력을 가하는 것은 똑같은 논리로 '자본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자본 속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식의 발상일 수 있다. 지식 체계라는 것도 결국 그 사회가 발 딛고 서 있는 물질적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국가에 의한 재구성이 자본에 의한 재구성으로 바뀌고 있지만, 그 둘은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는 하나의 매듭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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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몇 번의 계절을 보내면서 나는 도서관의 논리 구조가 국가 권력의 논리 구조를 닮았다는 엉뚱한 상상에 잠기곤 했다. 하드웨어를 중시하는 개발 논리는 이를테면 일 년을 못 버티고 교체되는 나무계단과 주차장 지붕, 이용자에게는 문화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사색의 계단'같은 식의 이름 붙이기, 어김없이 들어서는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점 등 도서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략)

     수직적 위계 구조를 가지는 권력의 논리는 공간의 배치 방식에서도 드러나며, 다시 공간의 배치 방식은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직적 위계 구조에 익숙해져 복종하도록 만든다. 서고 구석구석에 퍼질러 앉아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의견이나 관심사가 같거나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앉아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공간이 갖추어진 도서관과 그렇지 못한 도서관. 이것은 비유하자면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자본론>을 집필할 수 있는 공간과 국정교과서를 달달 외워 시험 준비를 하는 공간의 차이와도 같은 것이다. 도서관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독서실 역할을 해왔다는 것, 물음을 제기하는 곳이 아니라 물음에 대해 정해진 답을 암기하는 곳이었다는 것, 이 사실이 한국사회의 발전 과정이 쌓아놓은 흔적을 보여준다. 밤을 새워 노력하여 국가 혹은 그 누군가가 결정해놓은 '정답'을 숙지하고 시험에서 빠른 시간 안에 재현해내는 경쟁, 그 경쟁에서 승리하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뒤처지지 않고 앞서갈 수 있다(더 정확하게는 앞선 이들을 추격 해갈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의 장소가 바로 학교나 학원이 교실이었고 독서실이나 도서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서울에서도 여전히 일방적으로 제압하며 일탈을 통제하는 훈육의 원리는 학교, 학원, 국립도서관, 또 다른 수많은 장소들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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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서 강화되는 배제의 원리는 공간을 격리시킨다. 격리된 공간은 사람과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는다. 공공의 공간,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권리를 갖는 영역은 배제 원리가 확산됨에 따라 점점 줄어든다. 사유화된 공간과 사유화된 공간이 서로 맞설 때 남는 것은 어떤 사유(화)가 더 큰 힘을 갖는가 하는 것뿐이다.

     일상 곳곳에 깔린 CCTV,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차량 안에 설치하는 블랙박스 등은 안전에 대한 우리의 강박을 상징한다. (중략)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갖춘다고 해서 과연 우리는 더 안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미시적 안전과 거시적 위험(그러므로 불안)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시공간을 살고 있다. (중략) 불확실성을 위험으로 바꿈으로써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것은 주류 경제학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과연 개인적·사회적 위험은 최소화되거나 미리 제거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관리의 원칙은 미시적 안전과 거시적 위험의 기묘한 공존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거시적 위험과 불안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나 알아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알아서 살아남기',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 여기 서울의 공간에서 적용되는 중요한 생존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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