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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굿 라이프 | 최인철, 21세기북스엄마의 생각/독서 2022. 11. 30. 18:18반응형
인간은 모두 이론가다. 이론가답게 우리는 각자의 이론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에 관한 자신의 이론이 각자의 행복을 만들어간다. 따라서 원하는 만큼의 행복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기질이나 환경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행복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많은 좋은 것 중에 행복처럼 갈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드물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너무 행복할까 봐' 걱정한다. 너무 행복하면 오히려 불행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염려, 너무 많은 행복은 사람을 망친다는 불안 등 행복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happiness)이 커지고 있다. 너무 창의적이 될까 봐 걱정하지 않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행복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대린 맥마흔(Darrin M. McMahon)의 분석에 따르면,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는 행복을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 바라보는 관점의 변환을 가져왔다.
남의 시선과 기대에 연연하지 않고 내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삶의 자세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만족스럽다. 그 만족의 상태를 자겸(自謙)이라고 한다. 겸(謙)은 만족스러운 것이다.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스러운 상태를 바로 쾌족(快足)이라 한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정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긍정적인 감정, 예를 들어 감사, 희열, 뿌듯함, 경외감, 평화로움, 고요함, 이런 것들 말고 행복이라는 또 하나의 개별적인 감정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 감사를 느끼고, 삶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자연과의 조화가 주는 평안함을 만끽하면서도 여전히 '행복'이라는 감정의 결핍을 경험한다.
행복, 즉 쾌족의 상태는 고통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행복한 감정(快) 상태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긍정적인 감정들의 상대적인 비율로 측정된다. 부정적인 감정 경험보다 긍정적인 감정 경험이 더 많을 때를 행복한 상태라고 이야기할 뿐이지, 부정적인 감정 경험이 전혀 없어야만 행복하다고 결코 정의하지 않는다.
행복은 본질 자체가 자유로움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느슨해야 한다. 오직 이 방법만이 행복에 이르게 한다면서 하나의 길만을 제시하거나, 행복은 선택이 아니라 삶의 의무라고 행복을 종용하는 것은 행복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마음의 기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배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초부터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누구를 만나든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고, 지루한 일도 기쁘게 할 수 있는 마음의 비결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분석 결과, 어떤 경험(예를 들어 회의, 대화, 운동 등)을 하고 있는 순간순간의 즐거움과 의미는 그 일을 잘한다고 느끼는 정도보다는 그 일을 좋아한다고 느끼는 정도에 의해서 훨씬 크게 좌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잘하는지 여부가 행복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느끼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다.
심리학자 토리 히긴스(Tory Higgins)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이 세 개의 자기 간의 공존과 갈등의 장이다. 한 사람의 내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대로의 현실 자기(actual self), 되고자 열망하는 이상적인 자기(ideal self),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당위적인 자기(ought self) 사이의 괴리와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들 사이의 괴리는 개인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실 자기와 이상적 자기의 괴리, 현실 자기와 당위적 자기의 괴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행복은 현실 자기와 당위적 자기의 괴리보다는, 현실 자기와 이상적 자기의 괴리 정도와 훨씬 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때 행복이 찾아온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상적 자기와 현실 자기의 괴리를 좁히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상, 비전, 열정, 도전을 중시한다. (...) 전자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 따라서 전자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기뻐하고 흥분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실수하지 않았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비교'다. 반면에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관계'다.
행복한 사람은 소유보다는 경험을 사는 사람이다. 소유를 사더라도 그 소유가 제공하는 경험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경험보다는 소유를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경험을 하면서도 그 경험을 소유화, 혹은 물화(thingify)해버리는 사람이다.
첫째, 소유물은 비교를 불러일으키지만 경험은 비교를 유발하지 않는다. 소유는 본질적으로 '물건(thing)'이기 때문에 비교가 쉽게 일어난다. 아파트의 평수, 자동차의 배기량, 옷의 브랜드 등 물건의 가치는 쉽게 숫자화 될 수 있어서 비교가 용이하다.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는 남들과의 비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건을 구매한 후에도 자신보다 더 싸게 산 사람은 없는지, 더 싸게 파는 곳은 없었는지, 더 싸게 살 수 있는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닌지 등 전방위적인 비교가 발생한다. 최적의 물건을 최적의 시기에 최적의 가격으로 구매해야 한다는 이런 강박적인 소비 성향을 심리학자 베리 슈워츠(Berry Schwartz)는 '극대화(maximizing)'라고 부르고, 극대화 성향이 강할수록 행복감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와는 반대로 경험은 본질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교가 쉽지 않다. 추운 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 '옆집 물은 더 따뜻할 텐데'라고 비교하는 사람은 드물다. 영혼을 움직이는 도끼 같은 문장을 발견하고 '내 친구는 더 좋은 문장을 발견했을 텐데'라고 불안해하는 사람도 드물다. 소유와 달리 경험은 '지금 여기'의 심리 상태를 강하게 유발하기 때문에 경험하는 그 순간에 몰입하게 만든다.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둘째, 경험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우리가 보유한 소유물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소유물들이 우리의 취미나 선호, 그리고 성격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기는 하지만, 우리 내면의 심층까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 목록을 보아야 한다. 경험은 우리의 의식과 철학과 가치를 구성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진정한 자기(authentic self)를 만나는 경험이며, 진정한 자기와의 조우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무소유의 삶은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삶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 리스트를 늘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이력서(experiential CV)를 빼곡하게 채워나가는 사람이다.
아무리 강한 자극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 자극에 적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행복 혹은 불행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 따라서 어쩌다 한 번 강한 자극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 행복에 유리하다.
첫째, 의미란 중요성(significance)이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 모두 의미다. 의미 경험은 철저하게 주관적이어서 아무리 타인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간주하더라도 자신이 의미를 경험하면 그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공원에 모여든 새에게 모이를 주는 행위가 국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보다 의미가 약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세상을 먼저 떠난 자식이 새를 사랑했다면 날마다 새에게 모이를 주는 행위는 그 엄마에게 세상 어떤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다.
둘째, 의미는 유용성(usefulness)이다. 자신의 행위가 쓸모 있다고 느낄 때 그 일은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간 낭비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경험이 의미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 도중에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라고 속으로 후회한다면, 그 일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설사 그 행위가 타인의 눈에 아무리 무의미하게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의미 있는 행위가 된다.
셋째, 의미는 이해(understanding)다. 인간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옥규 중 하나는 세상을 이해하려는(sense-making) 욕구다.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의미 없음'을 경험한다. 어떤 고통이 다른 고통보다 특별히 더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 고통이 설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묻지 마' 범죄의 피해자와 그 가족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피해자가 그 범조의 대상이 된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왜 나에게!"라고 절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삶의 무의미함은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경험에서 발생한다.
넷째, 의미는 정체성(identity)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행위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과 연결되어 있을 때, 즉 자신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의미를 경험한다. 의미 있다는 것은 곧 자기다움은 뜻한다.
의미의 발견이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 있다면, 의미의 부재는 쾌락을 고통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
굳 라이프는 의미가 가득한 삶이다. 의미는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 의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며, 죽음의 공포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결과는 의미의 중요한 원천이 자기다움에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고 느낄 때, 인간은 의미를 경험한다.
분석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우선 개인의 주관적 안녕감과 쾌락주의는 부적(-) 관계를 보였고, 주관적 안녕감과 의미 주의는 정적(+) 관계를 보였다. 다시 말해, 굿 라이프가 '즐거움을 경험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라고 믿을수록 역설적으로 즐거움과 만족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굿 라이프가 '자기를 성장시키고 타인의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라고 믿을수록 자기 삶에 대한 만족감이 크고 긍정 정서도 강하게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의미 주의의 힘은 나이와 함께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성장하는 것과 타인의 삶에 기여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할수록 행복이 증가하는 패턴이 존재하는데, 이 패턴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해진다는 것이다.
자기의 성장을 도모하고 타인의 삶에 기여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중요한 원천이다. 따라서 이 결과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질수록 나이 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행복이 더 크게 증가함을 의미한다. 또한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이 오히려 감소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결과적으로 우리 연구는 쾌락과 의미가 상당히 중첩되는 경험이면서 동시에 매우 구별되는 경험임을 보여준다. 다수의 심리학자도 즐거움과 의미가 '관계있지만 구별되는(related but distinct)' 경험이라는 데 동의한다. 기분 좋은 삶을 산다는 것과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분명 서로 중첩되는 지점이 많지만, 동시에 미묘하게 다른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즐거움과 의미 모두를 균형 있게 추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의미 있는 삶은 의미 있는 성취를 필요로 한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앞에서 행복에 가장 중요한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로 유능감 욕구를 소개한 바 있다. 유능감 욕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 있는 결과들을 만들어낼 때 충족된다. 의미 있는 결과가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일 필요는 없다. 의미 있는 성취에는 (...) 등 매우 사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
둘째, 의미 경험이 굿 라이프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1부에서 소개한 PANAS를 살펴봐도 분명해진다. PANAS에는 '자랑스러운(proud)이라는 긍정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 자랑스러운 감정, 즉 자부심이란 사회가 인정하고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서 성취를 이루었을 때 경험되는 뿌듯한 감정을 말한다. 이는 자만심과 구분되는 감정으로서 의미 있는 성취를 전제로 한다.
PANAS에는 비록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고요함(serenity)'이라는 감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요함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새벽 숲 속에서 경험하는 고요함도 있지만, 중요한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에 찾아오는 고요함도 있다. 1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연주를 마치고 대기실 의자에 털썩 앉았을 때 그 순간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고요함도 있다. 밤이 늦도록 글을 쓴 작가가 잠시 동네를 산책할 때 느끼는 고요함도 있다. 이런 유의 고요함은 의미 있는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경험된다. 행복을 성취와 별개 혹은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이유는 우리가 행복한 상태에 대해서 지나치게 좁게 이해한 나머지 자부심이나 고요함 같은 감정들을 행복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 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성취가 행복을 유발하고, 행복이 다시 성취를 유발하는 선순환적 구조가 존재한다. (...) 긍정 정서는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확장시켜주고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자원인 건강, 관계, 수명, 창의성 등을 구축해준다고 주장한다.
소명과 성취는 목표를 전제로 한다. 의미 있는 목표를 성취하고, 그 목표가 자신의 소명이 되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이다.
(...)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목표의 크기가 아니라 목표의 개인적 의미다.
(...) 목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이다. 남의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발견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표의 일상성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하고 거대한 것들만이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목표 지상주의에 대한 경계라는 이름으로 작고 소중한 목표들을 등한시한다면, 자신만의 행복 수원지(水源地)를 스스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목표는 활주로와 같다. 그것이 없다면 삶은 충돌의 연속일 뿐이다.
긍정적 기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긍정에 대한 맹신이 긍정교(敎)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고, 행복 전도사라는 용어도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있다. 기질적으로 긍정 정서를 덜 경험하는 내향적인 사람들이나 신경증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마치 원죄(原罪)를 가진 양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연구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부정 정서보다 긍정 정서를 더 많이 느끼는 것이 바람직한 상태인 것은 맞지만, 학업과 직장 내에서의 성취를 위해서는 쾌(快)의 상태보다는 눈앞의 유혹을 이겨내는 자기 통제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 삶에는 긍정적 기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 의미가 대표적이다. 즐거운 삶과 의미 있는 삶이 제공하는 혜택이 다르다는 점을 시사하는 우리 연구는 즐거운 삶과 의미 있는 삶의 균형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인간의 4가지 의식: WIST>
1) 일(Work)
2) 사랑(Intimacy)
3) 영혼(Spirituality)
4) 초월(Transcendence)
위의 네 가지는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주제들이다. 인간은 이 네 영역에서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심리학 연구들은 이 네 가지 영역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할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건강하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 네 가지 영역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고 오직 물질주의적 목표, 쾌락적 목표, 그리고 순간적인 목표에만 탐닉하는 사람들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주장처럼 '실존의 절망(existential disappiointment)'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삶'을 추구하지 않고, '순간'만 탐닉하는 자기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실존의 절망이다. (...)
일을 통해 의미 있는 성취를 경험하려는 행위는 실존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미 있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삶,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도전 앞에서 실망하고 좌절하지만 결국에는 이겨내려는 용기와 기백, 그리고 그 일이 자신만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소명을 발견하는 기쁨. 이런 목표가 우리를 굿 라이프로 인도한다.
사랑은 단순히 이성 간의 애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타인에게 베푸는 삶, 타인에게 친절한 삶, 궁극적으로 인류 보편에 대한 자애심을 품으며 사는 삶까지를 포함한다. 사랑에 대한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다.
영혼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종교를 갖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월적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 그리고 우주의 기원과 질서에 대하여 경외감을 갖고 사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한마디로 성스러운 것(the sacred) 자체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이다.
초월에 대한 관심이란 의식의 중심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의식의 중심에서 현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 공동체에 대한 관심, 미래 세대에 대한 관심,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해 후대에 어떤 유산(legacy)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오직 자기에만 집착하여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지 않는 삶이 좋은 삶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삶의 이 네 가지 영역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다. 일, 사랑, 영혼, 초월에 대한 목표를 갖고 살 때 의미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의미는 의미 자체를 강박적으로 추구할 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중요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끝자락에서 자연스럽게 경험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은 의미를 경험해야 한다는 결심을 되풀이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 사랑, 영혼, 초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늘도 묵묵히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격(格)이란 관계의 편중성이 가져오는 의식의 편중성을 인식하고,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에 있다.
(...)
현대 경영의 구루(guru)이자 사상적 리더인 오마에 겐이치(Omae Kenichi) 역시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간을 바꿀 것, 만나는 사람을 바꿀 것, 그리고 시간을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새롭고 낯선 환경을 의도적으로 접하려는 노력의 대가가 작가 등 한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활발하게 시도했던 사회는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역사에 남겼다.
개방성(openness). 심리학에서는 이를 '한 개인의 정신적 경험적 삶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독창성과 복잡성'이라고 정의한다. (...) 편협한 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 새로운 사상과 예술에 대한 무관심, 동일성에 대한 압력은 우리의 정신을 폐쇄적으로 만든다.
당장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친숙한 환경에서 비슷한 사람들과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예측 가능한 세상이 주는 안락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도시의 공기'가 없다. 중세 농노들이 도시로 도주하거나 이주하여 느꼈던 자유와 경쟁과 개성의 공기가 없다. 파격을 꿈꾸고 새로운 사상에 마음을 여는 것을 장려하는 공기가 없는 것이다.
(...)
이동을 꿈꿔야 한다. 소수를 품어 안고,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 이주자, 이단아를 단죄하여 동질성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멈춰야 한다. 이사를 하든지, 제3의 공간을 만들든지, 여향을 하든지, 하다못해 다른 기관으로 출장이라도 가야 한다. '이주하는 자의 이점(The mover's advantage)'이라는 한 논문의 제목처럼 이동하는 자, 여행하는 자에게는 열린 의식이라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여행하는 자들이 누리는 행복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이 가져오는 도시의 공기는 주변인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그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신나는 수다를 통해 주변을 행복하게 만든다.
후견지명의 착각은 이렇듯 인간 삶에 필요한 요소지만, 동시에 심각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충분하고 체계적인 분석 없이 너무 빨리 진단과 대책을 마련하는 위험성이다. 이뿐 아니라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착각은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착각을 강화시켜서 우리를 오만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폄하할 가능성이 높다.
(...)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그 자신이 지적 호기심의 결핍이라는 피해를 입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죄를 범한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후견지명의 착각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강하다고 한다. 많은 대형 사건사고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의 분석에 "예고된 인재"라는 표현이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품격 있는 삶이란, 후견지명이라는 달콤한 지적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
품격 있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놀라는 사람이다. (...) 그 문제로부터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는 사람이다.
인간은 각자가 보유한 가정들에 의해 구분된다. 보수주의자는 빈곤을 개인의 역량과 노력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진보주의자는 빈곤이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일부 남자들은 여자들의 No를 Yes라고 잘못 가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기부를 선한 일이라고 가정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기부를 절세의 수단이라고 가정한다.
인격이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정의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은 도덕적 완성의 정도가 아니라 한 개인이 세상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가정들의 정확성과 품격의 문제다. 그러므로 인격 수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정들을 점검하여 나쁜 가정을 좋은 가정으로, 근거가 없는 가정을 정확한 가정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누구나 하는 평범한 가정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품격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자기가 늦은 이유는 차가 밀렸기 때문이지만 다른 사람이 늦은 이유는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가정, (...)
이런 평범한 가정들보다는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이 동일한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가정, 능력과 인품은 비례한다는 가정, 설사 결과적으로 이득이 생기더라도 남을 돕는 일은 여전히 이타적이라는 가정, 나처럼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나처럼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많다는 가정이 훨씬 품격 있다.
좋은 삶도 그렇다. 아무리 자기 확신이 강하더라도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조로 삶을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자유의 침해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확신에 찬 주장이라 할지라도, 더 나은 주장이 존재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인 경우에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의식의 편협함을 드러낼 뿐이다.
유연한 삶이 곧 타협하는 삶은 아니다. 삶의 복잡성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고, 생각의 다양성에 대한 쿨한 인정이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다. 확신을 갖되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품격이 있는 삶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확신으로 타인을 몰아붙이는 것은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상대의 행복을 위협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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